뉴스에서 인공비 내리는 것을 보고..
인간은 신이 하는 여러가지를 할 수 있다.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기가 그렇고 대기를 정화하기 위한 인공강우도 그렇다.
하지만 신이 하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은 막을 수가 없다.
PD 수첩 20주년 특집 문지애 아나운서 이야기를 듣고..
진실은 거짓의 반대말이 아니다.
진실은 가장 낮고 가장 어둡고 가장 냉혹하고 가장 구석에 있는 것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보는 시선이다.
그래서 때로는 진실이 가슴아프고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다.
탄생과 출산을 보고..
인간의 유전자는 침팬지와 99% 동일하고, 개와는 85% 동일하다.
인간은 침팬지와 단 1%의 유전자 차이로 인간이 된다.
성공하는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도 결국 딱 반발자국 차이다.
'생각하라'에 해당되는 글 52건
- 2010/06/24 이런저런..
- 2010/06/02 외근중 우연한 만남
- 2010/04/13 창립기념일~ 오늘의 스케줄 (3)
- 2010/04/04 2010.04.05 - inspiration (1)
- 2010/02/21 2010 봄이다..
- 2009/10/26 버스 안에서 문득.. (1)
- 2009/10/26 변화.. 그 자체로의 의미
- 2009/10/13 엄마..
- 2009/09/13 2009년 가을이 오다..
- 2009/07/15 twitter, tossi, me2day, Play Talk (2)
Posted on 2010/06/24 09:36
Filed Under 생각하라
Posted on 2010/06/02 12:19
Filed Under 생각하라
: 정말 저 안에 노회찬 있나?
: 과장님~ 함 가봐요~
: 응 그래그래 가보자!
: 꺅~~~ 너무 멋있어요!!
차 위에 있는 노회찬 후보를 보고 과장님이 급 흥분을 하신다.
답례하듯 청바지를 입은 노회찬 후보가 차에서 뛰어내려 악수를 청한다.
그참에 나도 악수한번 하고 사진한방 찍어주었다.
서울시민도 아닌데 기호 7번을 가리키며..

나는 정치인을 잘 모른다.
누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만들어 갈 사람인지 판단하지 못한다.
더 많은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되면 좋겠고 억울한 사람이 더 적어졌으면 좋겠고,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당연히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어느 정치인이, 어느편이 그렇게 만들 수 있을지는 판단하지 못한다.
한가지 알고 있는건 사람이건 편이건 견제를 통해서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권력과 부가 몰리게 되면 계속 몰리고 쏠릴뿐이라는 것.
주변에 노회찬 의원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
이번에는 서울시장 후보로 어차피 안될꺼라는 판단에 아쉽지만
아닌 것을 막기 위한 좀 더 영향력 있는 선택을 한다는 사람도 있고,
지지율이 조금만 높았다면 투표에 참여할 사람이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난 서울시민도 아니고.. 내게 주어진 투표권, 경기도지사 선택에 오늘 한표 던지고 온다.
그 사람이 연구하는 학문을 보면 그사람을 알게되고, 그사람의 주변인을 보면 그사람을 알게되고, 그 사람의 행적을 보면 그사람을 알게 된다. 왠지 노회찬 의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같다.
우리 세대가 주류가 될 때 쯤이면 진보신당 지지율도 꽤 올라가 있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아니면 우리 세대가 주류가 되면서 현세대 주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잘 모르는 노회찬 의원, 위키티피아에게 물어보았다. 내용이..참~ 길다.
한길 참 부지런히 달려오셨다.
노회찬(魯會燦, 1956년 8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7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다. 2008년 2월 5일 민주노동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심상정과 함께 초대 진보신당 공동상임대표(2008년 3월 16일~)를 역임했다. 현재 진보신당 대표(2009년 3월 29일~)를 맡고 있다. 2009년 11월 29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성장과정
1956년 부산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생 시절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고교시절 이화여고의 축제에 초청을 받고 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한 해 개봉영화를 모두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었다.[1] 중학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으나, 구기종목은 전혀 하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또 고등학교 2학년때 무술을 잘한다고 학내에 소문이 퍼져 노지심이라는 별명도 생겼다.[2]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시험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여 1973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부터 고향인 부산 떠나 서울에서 삶을 보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1973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씨알의 소리》, 《다리》와 같은 잡지를 읽게 되었고, 함석헌, 백기완, 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이 정광필 이우학교 교장, 이종걸 민주당 국회의원 등이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입시에 떨어졌다. 노회찬은 재수를 하지 않고 바로 군대를 지원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노동운동
대학에 입학 한 뒤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노회찬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3]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 했다. 그 뒤 서울, 부천,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 취업하게 된다. 첫 직장은 기아자동차였으나, 대학생 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 당한다. 그 뒤 여러 공장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정치적인 서클로 발전하게 된다.
“ 원래는 대공장 들어가려고 기아자동차에 시험 쳐서 붙었는데 실수를 해서 예비군 때문에 대학출신이라는 게 밝혀져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천에 있었던 현대정공 하청 회사에서 아주 초보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저희는 변혁을 위해서 노동자가 되어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기술도 배웠어요. 청소년 직업학교 다녀서 용접기술을 배웠죠. 그러고 있는데 83년쯤 되니깐 1명 2명 현장에 대학출신이 생기더니 84년 되니깐 더 많은 수로 학교 졸업한 위장취업자들이 오는 거라. 자연스럽게 그 전에 알고 지내던 후배들이 같이 하자 해서 써클을 만들었어요. 그 써클이 그 당시로서는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젤 컸어요.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컸지. 인민노련이 인천, 주안, 부천팀이 모여서 만들어지는데 그중 한 축이 되죠. [4] ”
대학생 노회찬은 이렇게 노동운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회찬은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긴 수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터진 789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억눌려왔던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시민권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이 출범했다.
“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변혁 지향적 노동운동은 일종의 ‘장기 매복’노선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의식 수준, 공안 기관의 감시 등을 이유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매우 신중한 활동 노선을 맞이한 듯했으나 대게는 인맥, 학맥에 따른 서클주의적 노동 운동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첫째로 가내 수공업 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분산된 서클들을 모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 운동으로 새롭게 배편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둘째로 과학적인 정치 노선과 조직노선으로 노동운동을 통일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셋째로 현장 노동자의 소모임 활동이나 일회적인 경제투쟁을 넘어선 공공연한 정치 선전과 선동 활동이 필요했고, 넷째로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인천 지역에서 지역정치 조직을 먼저 만들기로 했던 것입니다.[5] ”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은 80년대 운동의 유행이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즉, 정치적 신념을 현실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이 맹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인천 부평에서 창립을 선포했다. 결성 직후 내부 논쟁을 통해 NL진영이 이탈하면서,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의 운동 방향과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은 민중 민주(PD)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이하 인민노련)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진보정당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대선후보로 추대했으나, 백기완이 야권단일화를 위해 후보를 사퇴하게 된다. 이후 인민노련은 <노동계급>, <삼민동맹>[6], <안산노련>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났다. 인민노련은 당시 존재했던 진보적인 사회운동 조직 중 현장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가장 큰 전위조직이었다.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격주간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8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체포된다. 노회찬은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고 1992년 만기 출소한다. 옥중에서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원고를 구상하기도 했다.[7]
체포 1년 전인 1988년 12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김지선(현 여성의 전화 연합 조직위원장, 사단법인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소장, 가정폭력상담소 소장)과 결혼했다.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송영길 민주당 국회의원, 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국회의원 등이 있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이후 인민노련은 1991년 7월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한사노당 창준위 대표 주대환은 훗날 신노선이라 불리는 <진보운동의 신노선>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합법정당으로 조직을 전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신노선은 논란 끝에 통과되고 한사노당 창준위는 기존의 지하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1992년에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당한다.
민중당 당권파였던 김문수, 이재오, 장기표등은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보수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1992년 4월 1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를 결성한다. 진정추는 진보정당을 당장 건설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는 내부 평가를 내린 뒤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대응하기로 한다.
이 때 감옥에서 만기 출소한 노회찬은 진정추의 결정에 따라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 선거대책 본부>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백기완은 23만표, 1%정도의 지지를 얻고 패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실망하고 다른 길을 갔지만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하기로 한다.
“ 노 대표는 당시 진보정당의 실패원인을 △노동운동세력의 공식적 지지를 바탕에 두지 못한 점 △민족민주운동진영의 내부 갈등 및 대립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를 꼬집었다.
그는, “노동조합간부 등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긴 했지만 당시 전노협 등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출발한 점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민중당이 창당 순간부터 해산될 때까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진보정당에 동의하지 않은 또 다른 민중운동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그러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지평과 지형이 조성되어야 당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고, 이걸 공개적으로 글까지 써서 발표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8]
”
노회찬은 진정추 1기(1992년 4월 ~ 1993년 3월) 사무총장을 거쳐 2~4기 대표를 역임(1995년 9월)한다. 노회찬은 진정추를 "창당에 이르는 안정된 중간단계로서 준정당적 조직"[9]으로 위상을 규정하고 민중정치연합과의 통합을 추진한다. 1995년 9월 25일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거듭났다. 노회찬은 진보정치연합(이하 진정련)의 창립이후 진정련이 국민승리 21에 통합되기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진정추 활동을 하던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을 역임했다.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 발행으로 부채를 많이 지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때는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10][11]
노회찬 진정련 대표는 1996년 보수야당 소수파였던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추진한다. 1992년 민중당과 백기완 선거운동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섣부르게 창당했다가 조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치연합은 정치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직 구성원의 대부분이 민중당을 경험했던 상태라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총선용으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고요. 진보정치연합한테 1996년 총선은 진보 정당 재 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역 정치 활동의 기반을 견고히 하는 정도의 훈련이었습니다. 마침 제도 정치권의 반3김 세력, 일부 재야, 시민 단체들의 개혁신당 논의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총선을 위한 '선거연합'으로 규정했습니다. 진보정치연합 대의원 대회는 1996년 총선 방침으로 개혁신당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단 1996년 4월. 제15대 총선이 끝나면 개혁신당에서 철수하여 진보 정당 운동에 매진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개혁신당 참가는 진 보 정당 추진 세력들을 보존하고 장기적으로 재 창당에 대비 하기 위한 고육지책 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복권, 미공천 등 여러 사정으로단 1명만이 개혁신당 추보로 출마한으로서 이 전술은 실패했습니다.[12] ”
개혁신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노회찬은 이때 진보정당 추진세력의 대표 자격으로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적인 보수야당과의 제휴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국민승리21
국민승리21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6-97총파업[13]이후 민주노총은 보수 야당에 의존적인 기존의 노동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 역시 독자적 진보정당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련은 1997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논의 끝에 1997년 대선 기구로서 국민승리21이 출범하게 된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한다.
“ 네, 96년에 국민승리21은 제가 97년 1월 달에 <말>지에다가 이른바 민주민중세력들이 총집결해가지고 97년대선을 치르고 그 힘으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라는 제안을 사실 했었습니다. 하고 바로 저희는 그 작업에 착수했는데 일단 민주노총은 그해 6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중략) 농민운동조직은 아직 뜻은 같이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또 농민운동이 민주당과 함께 지역에서 지방선거도 같이 하고 여러 가지 해온 관계로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 그런 답변을 들었습니다. (중략) 농민 부분은 이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이후에나 이제 참여하게 되는 거죠. (중략) 그다음에 이제 빈민조직도 그 당시에는 공식적으로는 참여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러나 민주노총이 상당히 큰 힘이 사실 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전국연합이 참여를 (중략) 전국연합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참여를 했습니다.(중략) 이창복 의장을 포함해서 이창복, 천영세, 그다음에 최규영, 양재덕 이런 분들이 (중략) 유기홍 전의원도 참여를 사실 했었죠. 그 다음에 당시에 이제 진보정치연합 제가 대표로 있던 진보정치연합. 그래서 실제로 국민승리21 출범선언문에서도 그렇게 돼있습니다만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그리고 진보정치연합 주요하게는 이 세 조직을 중심으로 하되 폭넓게 그래서 국민승리21에는 뭐 오세철 교수나 김세균 교수 같은 (중략) 좌파지식인들도 참여를 했고 그 다음에 장기표씨도 초기에는 참여를 했었습니다. 국민승리21 대통령선거까지는 참여했고요. 그리고 거기서 권영길 위원장을 이제 대통령후보로 추대를 해서 선거를 치렀던 거죠.[14]
”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우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306,026표(득표율, 1.19%)를 득표하였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이 받았던 238,648표(득표율, 1.0%) 보다는 높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 국민승리21은 일단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정당작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1998년부터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원탁회의를 저희들이 제안해서 원탁회의를 만들었고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를 98년 하반기에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9년도에는 이른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월 30일 날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죠.[15] ”
민주노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승리21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전국연합은 공식적으로 국민승리21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1987년, 1992년과 달리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을 건설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국민승리21은 1998년 6월 4일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에서 23명의 당선자를 내어 기사회생하게 된다. 국민승리21은 충분히 준비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대응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이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조직이다.
민주노동당
국민승리21은 1999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창당준비위원회는 권영길, 양연수, 이갑용을 공동대표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창당 작업을 시작했다.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 30일 창당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2000년 16대 총선, 2002년 지방선거, 2004년 17대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의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18%의 저조한 득표를 기록했지만, 울산등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2, 광역의원 11명 (비례 9명 포함) 당선, 정당득표에서 8.13% 득표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회찬은 2002년 3월 민주노동당 정기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 당의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비례대표 순위를 뽑는 당내 선거에서 노회찬은 일반명부 4위를 기록해 8번째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제17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이 지역구에서 4석에 그치고 정당득표율이 3%에 미달해 비례대표를 배정받지 못하면서 10선에 도전한 김종필을 물리치고 국회의원이 되어 3김시대의 막을 내렸다.
노회찬은 2004년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선대본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로 유명세를 얻었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졌다. 《힘내라 진달래》는 2004년 11월 3일 제 13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17대 국회의원
노회찬은 17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배치되었다. 노회찬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에 선정되었다.[16] 2007년 12월 9일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서 신사적인 의원 베스트 10에 뽑혔다.[17] 이외에도 2005년 여성이 뽑은 여성친화적인 남성의원1위[18], 2006년 카드포인트 정치후원금 1위,2006년 진보지식인 대상 설문조사 대권후보 2위[19], 2005년 시민운동가가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2005년 PD들이 뽑은 베스트 의원 1위에 뽑혔다. 여성단체 호주제폐지 감사패, 한글을 빛낸 큰 별, 무지개 인권상, 장애인 차별금지법 감사패, 동남아 쓰나미 국회의원 우수외교상,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으로 불교계 감사패 등을 수상했다.
노회찬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아온 검사 7인을 공개한 이른바 "삼성 X파일"을 폭로했다. 또한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운동,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 학교급식 직영화, 일반병원까지 6세미만 어린이의 예방접종 무료, 아토피걱정 제로 프로젝트, 지역복지재정 확충을 위한 법 개정 추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추진,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전월세 세입자 보호법 추진등을 했다.
삼성 X파일 사건
MBC 이상호 기자가 2005년 7월 22일 방송을 통해 안기부 X파일을 공개했다. X파일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당시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잎과 이를 분석한 안기부의 보고서를 말한다. X파일에는 1997년 4월 부터 10월까지 시시각각 변해가는 당시 정국을 반영한 삼성측의 전방위 로비실태가 담겨있던 것으로 전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X파일에는 삼성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엄청난 뇌물을 건냈으며, 최고위급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때마다 1천만원에서 5백만원의 떡값을 뿌리며 검찰 인맥을 관리했다는 내용등이 포함되어있었다.[20]
그러나 방송에서 떡값을 받은 검찰들의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노회찬은 안기부 X파일을 입수 한 뒤, 2005년 8월18일 국회 법사위 회의에 앞서 배포한 '안기부 X파일' 관련 보도자료를 통해 옛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에서 삼성그룹의 떡값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ㆍ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그러나 검찰은 불법으로 금품을 수수한 고위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노회찬의원과 MBC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모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21]
노회찬은 1심에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2009년 12월 4일 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부장판사 이민영) 2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노회찬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난 느낌"이라며 "사필귀정"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오늘 판결은 삼성 X파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며 "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삼성 관계자, 중앙일보 관계자, 전 현직 검찰, 검경언권 모든 주체들이 삼성 X파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의 나머지 300여개 녹취 테잎이 아직 서울중앙지검에 남아 있다"면서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22]
2007년 대선과 진보신당 창당
노회찬은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 출마를 결정하고 대선 레이스에 참가했다. 노회찬은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주제로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23] 노회찬은 대선 후보 지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다른 두 후보(권영길, 심상정)보다 높은 인지도와 지지율을 보였지만, 당내 조직력은는 높지 않았다. 결국 노회찬은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다.[24] 노회찬은 경선 패배후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다. 대선 전부터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었던 정파간의 갈등은 대선후보 경선을 거치며 더욱 첨예하게 드러났다. 결국 권영길 후보가 2002년 대선(3.9%) 보다 낮은 3.0%의 지지를 얻고 대선을 참패했디. 대선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이 시작되었다. 당 지도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심상정 비대위를 출범 시켰다. 그러나 2008년 2월 3일 열린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동거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을 준비했다.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 이덕우, 박김영희, 김석준과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18대 총선 출마
노회찬은 진보신당 창당 직후인 2008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노원 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노회찬은 여론조사에서 줄곧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에게 앞서, 지역구 당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개표 결과 40%를 득표, 43%를 득표한 홍정욱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하지만 노회찬의 선전은 진보 정당의 후보로서 서울에서 상당한 득표를 했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의석이 없는 다른 소규모 정당과는 달리 정당 지지율 2%를 넘겼기에 정당등록취소를 면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정당보조금도 일부분 받을 수 있었다.
2위 대 1위 출마지역 득표율 득표수(명)
노회찬 대 홍정욱(한나라당)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40.05% 43.10% 32,111 대 34,554
18대 총선 이후 노회찬의 패배를 아쉬워 하는, 이른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 당원의 증가가 크게 이어졌다. 노회찬은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더 많은 지지자와 당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촛불시위
총선 이후 진보신당은 내부적으로는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재창당하여 본격적인 틀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앙당 측은 당 홈페이지를 통해 재창당에 대한 일반당원들의 의견을 물었으며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8년 5월 16일에는 재창당에 대한 평당원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해 광장에 나간 시민들을 당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재창당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노회찬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활발하게 참여했다. '진보신당 칼라TV'에 리포터로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촛불시위 초기 시위 배후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이 이어지자 "촛불시위의 배후가 있다면 이명박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협상 때문에 건강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순수하게 모여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25]
진보신당은 촛불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진보신당 칼라TV' 방송 이외에도 연행자 면회 및 경찰서 항의 방문, 연행 과정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에 대한 법률적 자문, 중간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한 중앙당 상황실 개설 등의 활동을 했다. 진보신당의 촛불시위는 총선 이후 지못미 효과와 이어져 당원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제2창당과 진보신당 대표 취임
촛불시위가 사그라들며 당 내부에서는 미뤄둔 '제2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는 의견이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2008년 9월부터 당내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지역별 순회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토론회에서는 현재 진보신당이 내걸고 있는 '4대 가치'인 평등, 생태, 평화, 연대로는 이념지향을 드러내기 힘들며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통합, 생태주의, 여성주의의 복수(複數)의 이념 등을 가치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9년 3월 1일에 용산 구민회관에서 열린 첫 정기당대회 1차 대회에서는 현행 공동대표 체제를 임기 2년의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하는 조직개편과 당명변경, 당 강령 개정, 재보궐선거 예비후보 선출 등이 결의되었다. 정기당대회 1차 대회의 결의에 따라 3월 23일부터 3월 27일까지 닷새간 당원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가 3월 29일에 송파 구민회관에서 열린 정기당대회 2차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심상정과 당 대표 경선이 예상됬지만 심상정의 불출마로 단독 출마해서 29일 열린 2차 당대회에서 전 당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투표에서 투표율 58.7%에 97.9%의 찬성을 받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진보신당 대표로 취임하여 "서민복지동맹"을 제안하고, 진보신당의 정책 상품을 개발하여 정책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 노동의 정치를 바로 세워 자본의 정치가 독점해온 정치의 역사를 청산하고, 이를 위해 서민 중심형 복지동맹으로 노동의 정치를 강화하겠다. [26] ”
2009년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서 울산 북구의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에서 원내정당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서울시장 출마
노회찬은 2009년 11월 29일 진보신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고.[27] 2010년 1월 31일 2010년 지방선거 출마후보를 결정하는 서울시당 후보선출 대회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서울"을 모토로 콘크리트 서울이 아닌, 보편적 복지정책을 펼치는 도시를 만들것을 주장했다.
“ (전략) 사람들의 인정이 사라진 자리에 콘크리트와 생존경쟁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뉴타운이 갈라놓은 동네주민들, 용산의 철거민들은 콘크리트와 생존경쟁이 남겨놓은 오늘날 서울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이렇게 서울 시민들은 삶의 질을 고민하는데, 서울 시장은 서울의 겉모습에만 열중해서야 되겠습니까? 아이는 학원비 걱정하고, 노부모는 병원비 걱정하고 있는데, 코나 높이는 성형수술 하겠다는 것이 지금의 오세훈 서울 시장 아닙니까.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서울에는 완전히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삶의 여유입니다. 시민들의 삶에서 걱정과 근심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보편적 복지와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이에게 복지를 엄마에게 일자리를, 아이와 엄마로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행복한 도시 서울. 이것이 제가 만들고자 하는 변하는 서울입니다. [28]
”
주요 저서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년)
《나를 기소하라》, (정보와사람, 2008년)
《법은 만명한테만 평등하다》, (정보와사람, 2007년)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년)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 실록》, (일빛, 2004년)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년)
《지역감정과 정치발전》, (고려대 심포지움,1995년)
《산업별 노동조합과 한국노동조합운동》,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1994년)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 (거름, 1990년)
《87,88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거름, 1989년)
《노동자와 노동절》, (석탑, 1983년)
공저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 (해피스토리, 2009년)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 (리더스북, 2009년)
《10살에 꼭 만나야 할 100명의 직업인》, (조선북스, 2008년)
《열정바이러스》, (바른지식, 2008년)
《어머니》, (매일경제신문사, 2006년)
《신영복 함께 읽기》, (돌배게, 2006년)
《대한민국 50대의 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년)
《나의 고전 읽기》, (북섬, 2006년)
《벌거벗은 이력서》, (휘즈프레스, 2007년)
《7인 7색, 일곱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곱 개의 세상》, (북라인, 2005년)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 93통》, (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시와 사회, 2004년)
Posted on 2010/04/13 11:13
Filed Under 생각하라
출발!!
→ 세종문화회관(스티브 맥커리'진실의 순간'사진전)
→ 종로구 보건소(피검사)
→ 삼청동(나무인형사고, 카페가서 책읽기)
준비물: 카메라
------------------------------------------------------------------------
→ 세종문화회관(스티브 맥커리'진실의 순간'사진전)
매그넘이 뭔지 알았고,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스티브 맥커리 작품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시간..
성공하는 사진작가는 부지런히 세상을 만나러 다녀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유난이 BK가 많이 생각났던 하루.

혼자 다녀도 셀프 타이머 걸어놓고 사진 잘 찍어요..

아프간 소녀의 묘한 눈빛을 카메라에 담았던 맥커리는 사진가로 상당한 위치에 서게 되고,
17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다시 찾게 된다. 17년 전에도 그렇고, 17년 후에도 그렇고..
사진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이며 정작 그녀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작가와 평론가들은 소녀의 눈빛이 아프간의 아픔을 전쟁의 슬픔을 전달한다고 했다.
보도사진은 해석이 아니라 진실 전달에 의미가 있다. 그러니 사진사는 정직해야 한다.
→ 종로구 보건소(피검사)
보건소 가는길~ 날 좋다~ 본의 아니게 청와대 앞을 지나가다.

→ 삼청동(나무인형사고, 수제비 먹고, 카페가서 책읽기)



북카페에서 책읽기. 지난 휴가때도 그랬지만 평일 이시간에는 대한민국 아줌마들 수다떠는 시간인가보다. 목동에서는 애들 교육 이야기가 주제였는데. 여기 삼청동 아줌마들은 며느리 흉보기가 주제다. 귀틀어 막고 책읽어 주다.

삼청동 입구에 파는 귀여운 나무인형..
집에 있는거랑 다른걸로 두개 샀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한테 선물할거다. 귀여운 것들..

오늘의 하이라이트
하이라이트는 주로 저녁에 술과 맛있는 음식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종로 속에 종로 광장시장에서 녹두전과 막걸리~

![]() | ![]() |
술깨고 깔끔하게 귀가하기 투썸플레이스
![]() | ![]() | ![]() |
쉬는날을 그냥 보낼라 초조했다만 대만족~!!
Posted on 2010/04/04 23:27
Filed Under 생각하라
영감으로 가득차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사람은 아름답다.
끊임없이 설레이고 에너지를 발산하고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그렇게 뜨겁게 산다.
어려서는 하루가 참 길었다.
그리고 시간이 참 안갔다.
어려서는 쉴새 없이 움직였을 거다.
시간을 아주 길게 썼을 것이다.
잠이라는 것은 나를 찾아와야지만 만나주었다.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간다.
나는 멈춰 있는데.. 시간은 정말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기억에도 없다.
.. 오늘 점심을 무엇을 먹었드라.
이런 시시한 질문도 우습지만, 바로 대답 못하고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머리는 더 우습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드는대로 얻는 것은 있다. 그건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이 연륜이라는 걸거다. 그러니 너무 기운빠져 있지 말자.
영감으로 가득한 눈을 갖고 있는 내모습..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PS:
오늘은 우리 그이가 도망가기 전 아이에게 짜장면을 사주는 엄마처럼 할말이 있다며 맛있는 요리와 와인을 사주었다. 우리 그이는 곧 집을 떠나 꿈을 찾아 간다. 늙은 아이 혼자 남겨두고..
집안 일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꿈을 찾아 가는 그이에게서 영감이 가득한 반짝이는 눈빛을 보았다. 음식은 뷰티풀했다. 오늘하루 그녀는 우리 그이였다.
Posted on 2010/02/21 19:25
Filed Under 생각하라

봄이다. 오늘은 햇살이 좋다.
창문을 열고 어제 포트락파티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저 멀리 탄천에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쓰리기만 했던 칼바람이 상쾌한 봄바람으로 바뀌어간다.
조금더 날 풀리면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타야겠다.
날이 좋아지니 집도 좋아진다.

포트락파티(Pot luckparty)! 상펴 놓고 숟가라고 놓고 기다리니 모두 한접시씩 들고왔다.
정성이 들어간 한접시 한접시 세팅을 하니 상다리가 휘어진다.
대접할 사이가 아니라면 모두가 즐거운 포트락파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엄마는 보쌈
큰언니네는 와인과 술안주
오빠네는 양장피
현경언니네는 또띠아
현미언니네는 과메기
나는 청국장, 밥
남은건 다 집주인꺼..
Posted on 2009/10/26 23:37
Filed Under 생각하라
행운이나 기회는 어느 한 순간 내게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여러가지 상황과 수많은 원인이 얽히고 얽혀 필연적으로 내게 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여러가지 주변의 원인들을 생각해본다.
모든 것은 복합적이야..이거이거 저거저거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왜 자꾸 주변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할까?
결국에는 내가 변한것이고, 단지 현재의 환경은 나와 맞지 않는 것 뿐인데...
그래서 새로운 것은 뭐든 끌리는 것인가 보다.
꽃밭이든, 암흙이든 결국에는 나의 길을 찾는 과정이다.
즐기자, 그리고 행복하자
Posted on 2009/10/26 23:26
Filed Under 생각하라
변화..
TV CF에서 변화.. 변화.. 변화타령이다.
변화는 단순히 Change.. 이전과 다르기만 한 것이 변화이다.
변화는 발전과는 다른건데.. 퇴보일수도, 부정으로 전환일 수도 있는게 변화인데..
너무 변화변화 거리네~ 싶었는데..
변화는 순수하게 변화로서 그 의미를 갖으니까
그 결과가 어떻든 변화는 진통이 있고 적응이라는 과정이 있으니까 어째튼 의미있다.
Change, so cool~
Posted on 2009/10/13 19:54
Filed Under 생각하라
가끔 우리집 아기 엄마들은 허공을 보고 멍을 때린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일까?
아이에 종속되 버린 시간 속에 오랜만에 나자신과 만나는 것이 낯썰은 것일까?
엄마.. 엄마가 되고나면 엄마는 아이의 시간으로 나를 채운다.
그래서 엄마다..
라고 말하면, 엄마의 삶은 어느 순간 너무 허전해지지 않을까?
Posted on 2009/09/13 18:26
Filed Under 생각하라

상쾌한 바람이 산들산들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여름내내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집안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걸려오는 전화도 없고..
남편이랑 오늘은 뭐할까.. 오늘은 뭐먹을까.. 그렇게 주말이 간다.
날씨만으로도 참 고맙고 행복했던 주말.. 이렇게 2009년 가을이 왔구나.
Posted on 2009/07/15 16:12
Filed Under 생각하라
twitter 붐때문인지..
우리 모본부장님께서 twitter 마케팅에 관심을 보이신다..
우선 둘러나보자,,
me2day
2Ne1 배너가 네이버에 뜨고 들어가 본적이 있다.
머가 먼지 당췌 중딩냄새만 가득한 곳.
미친들이 만드는 미투 신기능? 이라고? 나름 브랜드네임에 메뉴네임까지 통일된 컨셉을 잡으려고 노력한 것 같긴 한데..
뭔가 의미있는 것을 찾으려는 나에게는 답답하기만한, 껍데기들만 모아놓은 곳 같음.
에구 속터져. 이건머 거의 메신져나 댓글 모음 수준
홋.. 갑자기 감이 온다..
자산벨리락페스티발. 관심있는 것에 대한 다수와의 대화..올.. 여기까지.
tossi
들어가자마자 이미지와 함께 실시간 말풍선이 나와주니, 그나마 me2day 보다는 볼게 있어 뵌다. 허나, 이건 모. 글2줄, 이미지 2개 이상은 못올리게 하는 그저 미니 블로그?
모바일로 올릴 수 있는 점만 빼고는 블로그와 별다르지 않아 보임
Play Talk
우선 계정 만들기 전에는 안보여줌.
계정 만들고 나서도 안보여줌. 내꺼만 보임.
회사소개도 없고 메인페이지도 없고.
그래도 이외수 님의 플레이 톡이 보인다.
그래도 Play Talk이 제일 상업적인 냄새 덜나고, 진득허니 생각있는 사람들이 모인듯.
아 공감안된다. 영감이 안떠올른다. 자꾸 부정적인 생각들만 새록새록..
논리나 만들어야겠다. 쩝..
어린시절 싸이월드에 미니홈피 만들고,
결국 내 기억과 노력을 모두 그쪽 서버에 남겨둔채,
새로이 내공간에 내 것들을 채워 넣기 시작하면서,
이제 이쪽 활동은.. 인터넷 기업 배불려주는 것밖에 안되는 것 같아서,
소셜네트워크다 뭐다..별로 안좋아하는 필든데..자꾸 이쪽으로 마케팅을 하라니
영~ 감정이입이 안된다. 차라리 진득허니 운영하는 카페가 낫지 않을까 싶은데..
어디 좀 더 보자 ㅜㅠ






댓글을 달아 주세요